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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에디 슬리먼, 그 시절 디올옴므를 만든 남자.

2000년대는 스키니에 열광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비쩍 마른 남자 모델을 유독 선호하던 때였습니다. 그 트렌드에 에디슬리먼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의견을 달리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에디슬리먼은 1968년 7월 5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정치 사회학을 공부하다가 에꼴 뒤 루브르에서 미술사를 공부했으며 남성 패션 하우스에서 재단사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루이비통 모노그램 캔버스 100주년 프로젝트에 어시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1996년 생로랑 하우스에서 프레타포르테 디렉터를 맡게 되었고 그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스키니 실루엣을 선보였습니다. 이후 에디슬리먼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디올 옴므에서 일했습니다. 이는 남성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은 시기였습니다. 이 디자인 하우스에서의 시절에 에디슬리먼은 마르고 젊은 남성의 모습을 강조하는 스키니한 실루엣으로 남성 패션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에디슬리먼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깡마른 체형때문에 놀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처럼 깡마른 실루엣을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을 많이 내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 당시 디올옴므의 패션화보는 구루병 패션화보라는 비꼬는 말을 들을 정도로 상하의 모두 극단적으로 스키니한 핏을 입은 모델들이 넋나간 표정으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슬리먼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이라는 음악에 심취해 있었고, 당시 스트록스나 리버틴즈 등을 좋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피트 도허티는 슬리먼의 뮤즈였습니다. 

이전에 여성패션에서 디자인에 남성적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성적인 고정관념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많았습니다. 사실 슬리먼 남성패션에서는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가 과감하지는 않았습니다. 슬리먼은 딱 붙는 실루엣을 제안함으로써 남성복에서의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실 이 시기쯤 게이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긴합니다. 패션의 역사를 살펴 보면 그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알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디슬리먼의 디올옴므는 남성패션에 대한 관념을 재정의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2007년 디올옴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한동안 패션계 활동은 하지 않다가 2012년 생로랑의 디렉터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사실 생로랑이라는 이름도 에디슬리먼이 만들어 낸것이니 그 당시에는 이브생로랑이 맞겠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이브 생 로랑의 이미지는 우아함이었기 때문에 에디 스리먼디 브랜드를 디올옴므화 시킬것 같아서 걱정이었습니다. 그 예상은 맞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브생로랑에서 이브를 제거한 생로랑으로 라벨을 개명합니다. 그의 독특한 미학과 디자인 철학을 반영한 다양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이 시기는 이브생로랑이라는 브랜드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브랜드 자체의 무드가 락시크스러운 분위기로 바뀌면서 좀 더 상업적이고 대중적이어졌습니다. 이쯤 생로랑에서 내놓았던 어깨에 흰 선이 두 줄 있는 디테일의 블루종은 그당시 안 입는 남자 연예인이 없을 정도로 유행했습니다. 에디슬리먼 이전의 이브생로랑은 YSL이 겹쳐진 금장로고 박힌 가방정도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이렇게 트렌디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슬리먼에게 브랜딩 전권을 준 것이 생로랑에게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슬리먼의 생로랑은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보다 상업적인 스타일을 위해 브랜드의 유산과 전통을 포기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슬리먼의 디자인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나 문화를 반영하기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취향과 관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생로랑의 매출은 늘어났고 트랜디한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게 되었으니 에디 슬리먼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택한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슬리먼은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고 첫 컬렉션에서 피비와 꽤 많은 비교를 당하며 낮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만의 셀린을 잘 운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그의 예술가로서, 패션디자이너로서의 행보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