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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이브생로랑, 르스모킹! 그리고 생로랑

르 스모킹은 여성 패션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트렌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여성에게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턱시도 슈트를 입힐 생각을 하지 않던 시절, 최초로 이브생로랑이 남자 수트를 여성에게 입힙니다. 옷에 있어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해진 현대의 생각으로서는 저 시절의 충격을 가늠하기가 힘이 들지만, 모든 것이 최초일 때, 특히 그것이 고정관념에 관한 것 일 때 얼마나 큰 논란을 불러오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 시절 르 스모킹의 충격을 조금이나마 추측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브 생로랑은 프랑스 알제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무대의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패션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연약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머니와 여동생, 할머니와 함께 패션매거진을 즐겨보면서 자신의 꿈을 키워내 갔습니다. 17살에 참가한 국제 양모 사무국 디자인 경연의 드레스 부문에서 3등을 차지하며 보그 편집장 미셸 브뤼노프의 눈에 들게 됩니다. 그의 소개로 크리스티앙 디올에서 디올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브 생로랑의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디올과의 호흡이 잘 맞았고 크리스티앙 디올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57년 디올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이브 생로랑이 디올 하우스의 아트 디렉터를 맡게 됩니다. 다음 해 트라페즈 라인으로 찬사를 받으며 성공적인 시작을 이끌어 나갔지만, 이 후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디올 하우스의 주요 가치와 멀어져 혹평받게 됩니다. 당시 디올의 주요 고객들을 상류층 고객이었는데 이브 생로랑은 레프트 뱅크의 비트족의 거리 패션에 영감을 받는 등 소위 말하는 하위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내놓았고, 우아함과 화려함을 기대하는 고객과 언론에서 외면을 받게됩니다. 이후 60년에 알제리 전쟁으로 프랑스군에 징집되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신경쇠약으로 군 병원에 입원하고 디올에서 해고당하게 됩니다. 위기에 처한 그는 피에르 베르제의 도움으로 61년 이브 생로랑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고 극찬받는 첫 컬렉션을 내놓게 됩니다. 그는 시스루 디자인,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 해군 코트에서 영감을 받은 여성용 코트, 몬드리안을 오마주한 드레스, 팝아트에서 영감을 받은 룩, 사파리 재킷 등의 혁신적인 의상을 내놓으면서 승승장구합니다. 특히 '르 스모킹'은 생로랑이 생에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불렀을 만큼 이브 생로랑 하우스에 큰 성공을 불러온 스타일이었습니다. 당시 생로랑은 상류층 소수를 위한 오뜨 꾸뛰르가 아닌 대중들을 위한 프레타 포르테, 즉 기성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가 점점 풍요로워지면서 대중들 또한 패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천재 디자이너가 내놓은 대중들을 위한 기성복 라인인 '생로랑 리브 고슈'는 큰 인기를 끌며 성공했습니다. 샤넬은 여성에게 자유를, 생로랑은 여성에게 권력을 주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는 에스닉룩에도 관심이 많아서 패션쇼에 흑인과 동양인 모델을 기용하거나 프랑스 흑인 모델을 뮤즈로 삼기도 했습니다. 승승 장구하던 이브 생로랑은 라이센스 남발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저기 붙은 이브 생로랑이라는 로고는 브랜드 가치를 바닥으로 떨어지게 했고, 결국 브랜드는 경영권이 여기저기로 갈라져서 넘어가게 됩니다. 그 결과 구찌의 케링그룹이 경영권 일부를 가지게 되면서 기성복 라인은 톰 포드가 맡게 되었고 이브 생로랑은 오트 쿠튀르 라인만 맡게 되었습니다. 생로랑은 2002년 65세의 나이로 마지막 컬렉션을 발표하며 은퇴하였고, 2008년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패션에서 브랜드라는 것이 오로지 그 로고와 모노그램, 가방, 사치로 소비되기보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패션으로서 사회에 이야기하고자 했던 정신들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